전체 글43 『시』 리뷰 - 잊혀가는 기억 속에서 써 내려간 마지막 문장 미자, 낯선 단어를 하나씩 잃어가며 시를 배우기 시작하다이창동 감독의 시는 초로의 여성 양미자가 문화원에서 열리는 시 창작 강좌에 등록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미자는 화려한 옷차림과 꽃무늬 스카프를 즐기며 살아가는 소녀 같은 감성을 지닌 노인으로, 손자 종욱과 단둘이 살며 간병인 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영화 초반, 그녀는 병원에서 우연히 자신이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단어를 잊어가는 증상이 점점 심해질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언어를 잃어간다는 진단을 받은 바로 그 시점에 시를 배우기 시작한다는 설정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러니이자 핵심 주제로,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오히려 가장 정교한 언어의 예술에 다가서려는 인간의 안간힘을 상징한다. 시 강좌의 강사는 수강생들에게.. 2026. 9. 4. 『오아시스』 리뷰 - 세상이 외면한 두 사람이 나눈 사랑 출소한 종두, 죽은 이의 제삿날 낯선 집 문을 두드리다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 지적 장애를 지닌 전과자 홍종두가 교도소에서 출소한 직후 자신이 대신 옥살이를 했던 사건의 피해자 유족을 찾아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종두는 뺑소니 사고를 낸 형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다녀왔지만, 정작 가족들은 그가 돌아온 것을 반기기는커녕 부담스러워하며 거리를 둔다. 철없고 눈치 없는 종두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피해자의 제사가 열리는 날 과일을 사 들고 불쑥 찾아가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피해자의 중증 뇌성마비 딸 한공주를 처음 마주하게 된다. 어눌한 말투와 불편한 몸짓, 사회적 눈치를 전혀 살피지 않는 종두의 태도는 초반부 내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가 세상의 위선적인 예의범절에 물들지 않은 순수.. 2026. 9. 4. 『박하사탕』 리뷰 - 거꾸로 되감아야 보이는 한 남자의 생 나 다시 돌아갈래, 기찻길 위에서 터진 절규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1999년 봄 야유회에 나타난 낯선 중년 남자 김영호가 철길 위에 올라서서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첫 장면은 이 영화 전체의 감정적 종착지이자 동시에 출발점으로, 이후 영화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절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하나씩 되짚어간다. 야유회에 모인 사람들은 이십 년 전 함께 강가에서 놀던 옛 동료들이었고, 영호가 부르는 노래와 몸짓은 젊은 시절 순수했던 그의 모습을 얼핏 떠올리게 하지만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의 표정과 눈빛은 관객에게 낯선 두려움을 안긴다. 이창동은 영화의 구조를 총 일곱 개의 에피소드로 나누고, 각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기차가 반대 방향.. 2026. 9. 4. 『살인의 추억』 리뷰 - 밝혀지지 않은 얼굴을 응시하는 카메라 논두렁에서 시작된 수사, 박두만 형사의 감과 주먹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되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쫓는 사람들의 무력감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논두렁에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 오프닝 롱테이크는 아이들이 논둑에서 뛰노는 평화로운 풍경과 시신이라는 참혹한 발견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내며 이후 이어질 이야기의 정서를 압축적으로 예고한다. 지역 형사 박두만은 과학수사 대신 관상과 감으로 용의자를 지목하는 인물로, 증거보다 촉을 믿고 무고한 용의자를 폭력적으로 몰아붙이는 구시대적 수사 방식을 대표한다. 그는 발자국 하나만 보고도 범인의 관상을 맞힐 수 있다고 자신.. 2026. 9. 3. 『올드보이』 리뷰 - 이유도 모른 채 갇힌 15년이 던지는 질문 군만두로 채워진 사설 감옥, 오대수가 견딘 시간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평범한 회사원 오대수가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설 감옥에 감금되면서 벌어지는 복수극이다. 딸의 생일에 술에 취해 파출소에서 소란을 피우던 오대수는 친구의 전화를 받은 뒤 홀연히 사라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호텔 방처럼 꾸며진 좁은 방 안에 갇혀 있다. 창문도 없이 텔레비전 한 대만 놓인 이 공간에서 그는 매일 군만두만 배달받으며 무려 십오 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동안 오대수는 텔레비전을 통해 아내가 살해당하고 자신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며 절망하고, 동시에 언젠가 이곳을 나가면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벽에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며 정신을 다잡는다. 그는 좁은 방 안에서 홀로 권투를 연습하며 .. 2026. 9. 3. 『기생충』 리뷰 - 반지하 계단 하나에 담긴 계급의 무게 냄새로 그어진 선, 기택네 가족이 넘본 문턱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반지하에 사는 기택 가족이 박 사장네 저택에 하나둘 스며드는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를 정교하게 해부한 작품이다. 백수로 지내던 장남 기우가 친구 민혁의 소개로 박 사장네 딸 다혜의 과외 선생으로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명문대 재학증명서를 위조하는 장면에서부터 이미 이 가족의 생존 방식이 드러난다. 이후 기우는 여동생 기정을 제시카라는 가상의 인물로 꾸며 미술 심리 치료사로 소개하고, 기정은 기존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 문광을 교묘한 계략으로 몰아내며 아버지 기택과 어머니 충숙까지 차례로 저택에 자리 잡게 만든다. 이 과정은 통쾌하면서도 불편한데, 가난한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약자의 자리를 .. 2026. 9. 3. 이전 1 ··· 4 5 6 7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