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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리뷰 -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그 말 이후

by 힐링홈 2026. 9. 13.

남영동 조사실에서 시작된 거짓말

장준환 감독의 1987은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끝에 사망한 사건에서 출발해 그해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간을 촘촘하게 재구성한 작품이다. 영화는 박종철의 죽음을 은폐하려는 공안 권력과 이를 파헤치려는 이들 사이의 팽팽한 대치를 다층적인 시선으로 그려내는데, 김윤석이 연기한 박처장은 공산주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분 아래 고문과 조작을 서슴지 않는 냉혹한 인물로 등장해 이 시대 국가 폭력의 얼굴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사건 초기 경찰은 박종철의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처리하려 하지만, 하정우가 연기한 최검사는 시신을 화장하지 말고 부검하라는 지시를 내리며 진실을 향한 균열의 첫 틈을 만든다. 이 균열은 이후 언론과 재야인사, 교도관 등 각기 다른 위치에 있는 인물들을 통해 조금씩 넓어져 간다. 특히 유해진이 연기한 교도관 한병용은 수감 중인 재야인사들과 외부 사이의 비밀스러운 연락책 역할을 자처하며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인물은 실제 역사에서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의 헌신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영화는 이처럼 하나의 영웅적인 주인공을 내세우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용기를 낸 여러 인물들의 릴레이를 통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이러한 군상극적 접근은 관객으로 하여금 민주화라는 것이 소수 영웅의 업적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이들의 연쇄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만든다. 부검을 지시한 최검사의 선택은 정치적 신념보다는 원칙에 대한 고집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러한 설정은 거창한 영웅주의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원칙을 지키려 한 사람들이 결국 거대한 진실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는 이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뒷받침한다. 언론사 기자 윤상삼 역시 검열과 압박 속에서도 진실을 보도하려는 언론인의 역할을 대변하며, 조작된 사인 발표에 의문을 품고 취재망을 좁혀가는 과정을 통해 진실이 은폐에서 폭로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다리를 놓는다. 박처장으로 대표되는 공안 세력이 진실을 덮기 위해 또 다른 조작과 회유, 협박을 동원하는 과정을 영화는 세밀하게 뒤쫓는데, 권력이 하나의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후속 거짓말을 필요로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 구조야말로 국가 폭력의 작동 방식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다.

연희가 걸어 들어간 거리, 이한열이 쓰러진 순간

영화 후반부에서 중심에 서는 인물은 김태리가 연기한 대학 신입생 연희다. 연희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그저 평범한 캠퍼스 생활을 꿈꾸는 인물로, 시위와 진압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캠퍼스 풍경 속에서도 애써 거리를 두려 한다. 그러나 삼촌인 한병용의 부탁으로 얼떨결에 위험한 심부름을 하게 되고, 같은 과 선배인 이한열을 비롯한 학생운동권 인물들과 가까워지면서 연희는 서서히 시대의 흐름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강동원이 연기한 이한열은 실존 인물로, 훗날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며 6월 항쟁을 전국적인 국민 저항으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인물이다. 영화는 이한열이 쓰러지는 그 유명한 순간을 실제 보도사진의 구도를 참조해 재현하는데, 이 장면은 관객에게 단순한 영화적 재현을 넘어 실제 역사적 기억을 환기시키는 강렬한 힘을 지닌다. 연희라는 캐릭터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간 무수한 평범한 청년들을 대변하기 위해 창조된 인물인데, 그가 처음에는 시위에 무심하다가 점차 거리로 나서게 되는 심리적 변화는 관객 자신이 그 시절 거리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자문하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한다. 영화는 이 캐릭터를 통해 역사적 사건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뿐 아니라, 그 주변에서 망설이고 두려워하다가도 결국 함께 걸어 나온 이들의 존재를 함께 조명하고자 한다. 연희와 이한열이 도서관에서 스치듯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소소한 장면들은 무거운 시대극 속에서도 청춘의 풋풋한 정서를 잠시 환기시키는데, 이러한 일상적인 순간들이 있었기에 이한열의 죽음이 관객에게 더욱 현실적인 상실로 다가온다. 김태리는 이 영화에서 두려움과 호기심, 그리고 점차 커져가는 분노 사이를 오가는 연희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소화하며, 정치적 각성이라는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관객이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도록 이끄는 감정적 안내자 역할을 해낸다. 연희의 삼촌인 한병용이 조카를 위험에 끌어들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결국 그를 시대의 소용돌이 한복판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딜레마 역시 이 영화가 놓치지 않는 섬세한 감정선이며, 유해진은 이 인물 특유의 유쾌함과 비장함을 오가는 이중적인 결을 설득력 있게 소화해낸다. 강동원이 짧은 분량으로 등장함에도 이한열이라는 인물에게 실제 역사적 무게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은, 화면 속 그의 존재를 소모적으로 부풀리지 않고 담담하게 스쳐 지나가듯 그려낸 절제된 연출 덕분이다.

명동성당 앞에 모인 사람들, 그리고 사라지지 않은 함성

1987의 클라이맥스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이한열의 희생이 겹치면서 전국적으로 터져 나온 6월 민주항쟁의 거리 장면들로 완성된다. 영화는 이 시기 명동성당에 모인 시민들과 전국 각지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를 대규모 군중 신으로 담아내는데, 특정 스타 배우 한 명이 아니라 수많은 단역과 엑스트라, 그리고 실제 그 시절을 살았던 세대의 얼굴들이 뒤섞인 이 장면은 이 영화가 개인의 서사를 넘어 집단적 기억을 재현하려는 시도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넥타이 부대라 불리던 회사원들까지 거리로 나와 시위에 동참하는 장면은 6월 항쟁이 특정 계층이나 세대의 운동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폭넓은 저항으로 확산되었음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영화는 이러한 격동의 순간들을 그리면서도 신파적인 감정의 강요보다는 사실에 기반한 사건의 흐름을 차분히 따라가는 방식을 택하는데, 이는 오히려 관객에게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결말부에서 연희가 시위대의 함성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은, 한 개인이 방관자에서 역사의 참여자로 거듭나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이 영화의 정서적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카메라는 이 장면에서 연희 한 사람의 얼굴에 머무르지 않고 서서히 뒤로 물러나며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얼굴들을 함께 담아내는데, 이러한 시각적 확장은 한 개인의 각성이 결국 거대한 집단적 움직임의 일부로 합류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완성시킨다. 1987은 이처럼 하나의 죽음이 은폐되지 않고 밝혀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용기와 연쇄적인 선택이 필요했는지를 보여주며, 그 결과로 얻어진 오늘의 민주주의가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묵직하게 각인시키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엔딩 크레딧에서 실제 1987년 6월 항쟁 당시의 다큐멘터리 영상과 사진 자료를 삽입한 연출은, 지금까지 스크린에서 본 이야기가 배우들의 연기를 빌려 재현된 실제 역사임을 다시 한번 관객에게 상기시키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마무리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으로 하여금 오늘날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가 어떤 희생 위에서 세워졌는지를 곱씹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개봉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임에도 다양한 세대의 관객이 폭넓게 극장을 찾았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특정 진영의 서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의 공통된 기억을 다루고 있다는 공감대를 이끌어냈음을 방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