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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리뷰 - 피구공이 튕겨 나가던 순간 무너진 열한 살의 세계

by 힐링홈 2026. 9. 10.

 

선이 마지막 순번까지 남겨지던 체육 시간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은 초등학교 4학년 선이 체육 시간 피구 경기에서 아이들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남겨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짧은 장면 하나만으로 영화는 선이 반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대사 한마디 없이 설명해낸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선은 전학생 지아를 만나게 되고 두 아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지아는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 집에 맡겨져 지내는 처지이지만 선 앞에서는 유복한 집 아이인 척 허세를 부리기도 하는데, 이러한 소소한 거짓말과 감춤은 어른들의 세계에서라면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아이들의 관계에서는 신뢰를 뒤흔드는 균열의 씨앗이 된다. 방학 동안 봉숭아물을 들이고 손을 잡고 다니던 두 사람의 우정은 개학과 동시에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지아가 선을 따돌리던 보라와 어울리게 되면서 선은 다시 혼자가 되고, 급기야 지아마저 선을 따돌리는 무리에 합류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영화는 이 배신의 과정을 어른의 시선에서 재단하지 않고, 아이들 각자의 논리와 두려움 속에서 벌어지는 일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선의 남동생 윤이 형들에게 맞고 들어와서도 다시 밖으로 나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선의 표정인데, 이 장면은 이후 선이 지아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내리는 선택과 묘하게 공명한다. 윤가은 감독은 아이들의 세계를 절대 축소된 어른의 세계로 다루지 않고,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사회이자 생존의 장으로 포착해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여느 성장영화와 구분 짓는다. 영화 속에서 선의 엄마는 분식집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리느라 늘 바쁘고, 아빠는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딸을 다독이려 애쓰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러한 가정의 경제적 여건은 선이 지아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열등감과도 은근히 맞닿아 있다. 지아가 선물한 고급 학용품이나 지아의 집에 대한 묘사가 실제와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에도 영화는 이를 극적으로 폭로하기보다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대화로 처리하며, 이러한 절제된 태도야말로 이 작품이 신파로 흐르지 않게 만드는 핵심적인 연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여름방학 동안 두 아이가 매미 소리 가득한 골목을 함께 뛰어다니고,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나누던 대화들은 그 자체로 순수한 우정의 절정을 보여주는데, 이 장면들이 있었기에 이후 벌어지는 관계의 균열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최수인과 설혜인이 빚어낸 진짜 얼굴들

이 영화가 특별한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아역 배우들의 연기를 이끌어낸 연출 방식에 있다. 윤가은 감독은 두 주연 배우인 최수인과 설혜인에게 정형화된 대본 암기 대신 상황과 감정을 던져주고 자연스러운 반응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촬영에 임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 결과 스크린에 담긴 표정과 몸짓은 연기라기보다는 실제로 그 나이대 아이들이 겪는 감정의 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사실성을 획득한다. 선을 연기한 최수인은 친구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상처받을까 두려운 마음 사이에서 오가는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하며, 특히 지아의 눈치를 살피는 순간의 미묘한 표정 변화는 이 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지아를 연기한 설혜인 역시 부모의 부재와 결핍을 숨기려는 허세와 그 이면의 외로움을 능숙하게 오간다. 카메라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최대한 맞춰져 있는데, 어른들은 종종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존재하거나 인물의 등이나 다리만 비춰지는 방식으로 처리되며, 이는 관객이 철저히 아이들의 시점에서 사건을 경험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다. 또한 이 영화는 폭력적인 사건이나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배제한 채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 이를테면 매니큐어를 나눠 바르는 장면이나 편지를 주고받는 장면, 급식실에서 자리를 잡는 미묘한 신경전 같은 디테일들을 촘촘히 쌓아 올려 서사를 완성한다. 이러한 연출은 극적 사건 없이도 관객이 아이들의 감정선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게 만들며, 왜 이 영화가 국내외 평단으로부터 아동을 다룬 가장 섬세한 한국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지를 증명한다.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전체 대본을 미리 나눠주지 않고 그날그날 상황만을 전달했다는 일화는 이 영화가 왜 그토록 즉흥적이고 살아 있는 리액션으로 가득한지를 설명해준다.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자의식보다 실제 그 상황에 놓인 사람처럼 반응했고, 그 결과 관객은 스크린 속 인물이 아니라 우리 주변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했을 법한 아이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리얼리즘은 이후 한국 독립영화에서 아동과 청소년을 다루는 연출 방식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클로즈업을 절제하고 아이들의 몸 전체가 프레임 안에 담기도록 구성한 촬영 방식 역시 관객이 인물의 표정 하나에 매몰되지 않고 그들이 놓인 공간과 관계의 맥락까지 함께 읽어내도록 돕는다.

다시 편을 나누던 순간, 선이 내민 손

우리들의 결말부는 초반부와 마찬가지로 피구 경기 장면으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지아가 선을 따돌리던 보라 무리에게 규칙 위반을 지적당하는 상황에 놓이고, 선은 지아가 위기에 처한 순간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한다. 그동안 자신을 배신하고 상처 준 친구를 옹호할 것인가, 아니면 그 배신에 똑같이 응수하며 관계를 완전히 끝낼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서 선이 내리는 결정은 이 영화 전체가 던지는 질문의 핵심을 관통한다. 영화는 이 순간에도 명쾌한 해답이나 극적인 화해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마주 본 채 말을 잇지 못하는 두 아이의 표정 위로 담담히 엔딩 크레딧이 오르며, 관객 각자에게 우정과 배신, 용서에 대한 판단을 남겨둔다. 이러한 결말의 개방성은 이 영화가 단순한 교훈극으로 흐르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힘이기도 하다.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봉숭아물이라는 소재 역시 상징적인데, 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에 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처럼, 아이들 사이의 우정 역시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고 지워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은유로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이 그려내는 것은 결국 왕따라는 사회적 문제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계란 본질적으로 다치고 회복하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성찰이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이 진실을 열한 살 아이들의 여름을 통해 담담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개봉 이후 여러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독립영화의 대표작으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영화는 동생 윤이라는 존재를 통해 또 다른 층위의 이야기를 함께 쌓아 올리기도 하는데, 윤 역시 자기 반에서 비슷한 따돌림과 다툼을 겪으면서도 선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정면으로 부딪히고 다시 화해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풀어간다. 두 남매의 대비되는 태도는 관객으로 하여금 어느 쪽이 옳은 방식인지를 섣불리 판단하지 못하게 만들며, 오히려 관계를 회복하는 데는 정해진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일깨운다. 이처럼 우리들은 표면적으로는 초등학생들의 여름방학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인간관계 전반에 걸친 보편적인 질문을 촘촘히 담아낸 작품으로 완성되어 있다. 개봉 당시 큰 상업적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먼저 호평받았고, 이후 입소문을 타고 국내 관객들 사이에서도 재발견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이들에게 오래 곱씹히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