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자, 낯선 단어를 하나씩 잃어가며 시를 배우기 시작하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초로의 여성 양미자가 문화원에서 열리는 시 창작 강좌에 등록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미자는 화려한 옷차림과 꽃무늬 스카프를 즐기며 살아가는 소녀 같은 감성을 지닌 노인으로, 손자 종욱과 단둘이 살며 간병인 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영화 초반, 그녀는 병원에서 우연히 자신이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단어를 잊어가는 증상이 점점 심해질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언어를 잃어간다는 진단을 받은 바로 그 시점에 시를 배우기 시작한다는 설정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러니이자 핵심 주제로,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오히려 가장 정교한 언어의 예술에 다가서려는 인간의 안간힘을 상징한다. 시 강좌의 강사는 수강생들에게 진짜 사과를 알기 위해서는 사과를 관찰하고 만지고 냄새를 맡아야 한다고 말하며, 평생 처음으로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미자는 놀이터의 나무와 떨어진 살구, 흐르는 강물을 하나하나 눈에 담기 시작한다. 윤정희는 은퇴 후 오랜만에 스크린에 복귀하여 미자를 연기했는데, 소녀 같은 순수함과 노년의 쓸쓸함을 동시에 지닌 이 인물을 섬세한 눈빛과 몸짓만으로 표현해내며 깊은 울림을 남겼다. 이창동은 초반부 내내 미자의 일상과 시 강좌 풍경을 잔잔하게 교차시키며, 관객이 그녀의 감수성에 서서히 젖어들도록 이야기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춘다. 미자가 병원 대기실에서 다른 환자와 나누는 짧은 대화나, 시장에서 물건값을 흥정하며 밝게 웃는 장면들은 그녀가 여전히 삶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을 잃지 않은 인물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런 그녀조차 서서히 자신을 이루던 언어와 기억을 놓아야 하는 잔인한 시간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조용히 각인시킨다. 시 강좌의 다른 수강생들이 저마다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시어를 나열할 때 미자만이 유독 구체적인 사물과 순간에 집중하는 모습은, 그녀가 언어를 다루는 방식이 머리가 아니라 몸과 감각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암시하며 이후 그녀가 완성하게 될 시의 성격을 미리 예고한다. 미자가 강좌 도중 창밖에 떨어지는 살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것은 스스로 몸을 던진 것이라고 중얼거리는 대목은, 아직 관객이 사건의 전모를 알기 전임에도 이미 죽은 소녀의 투신을 무의식적으로 암시하는 절묘한 복선으로 기능하며 이창동 특유의 은유적 각본 구성을 잘 보여준다.
손자의 죄와 합의금, 침묵을 지키는 아버지들의 모임
평온하던 미자의 일상은 손자 종욱이 같은 학교 남학생들과 함께 여학생 박희진을 지속적으로 성폭행했고, 그 여학생이 견디다 못해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완전히 뒤흔들린다. 가해 학생들의 아버지들은 사건이 외부에 알려져 아이들의 앞날에 지장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은밀히 모임을 갖고, 피해 여학생의 어머니에게 합의금을 지불해 사건을 조용히 무마하려 한다. 미자는 이 모임에 참석해 다른 아버지들이 사건을 마치 사업 문제처럼 냉정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정작 자신은 손자를 대신해 마련해야 할 합의금 삼십만 원 앞에서 현실적인 무력감을 느낀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간병하던 마비 환자 노인의 은밀한 부탁을 받아들여 성적 관계를 갖고 돈을 받는 등, 평소의 우아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선택까지 하게 되는데, 이는 손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존엄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처지에 몰린 한 인간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미자는 정작 손자 종욱에게 사건에 대해 제대로 캐묻거나 다그치지 않고, 오히려 죽은 여학생의 흔적을 홀로 좇으며 그녀가 다니던 성당을 찾아가 미사에 참석하고 그녀의 이름이 아그네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미자의 행보는 가해자 가족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향한 진정한 애도와 책임감을 잃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도덕적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다른 아버지들의 무감각한 태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미자가 사고 현장이었던 강가 다리를 홀로 서성이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우산도 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대사 한마디 없이도 그녀가 감당하고 있는 죄책감과 슬픔의 무게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손자 종욱은 이러한 할머니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게임을 하고 밥을 먹는 등 무심한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는데, 이 무신경함은 오히려 관객에게 가해자 스스로는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무게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서늘하게 각인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미자가 결국 형사에게 손자의 죄를 알리는 듯한 암시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결말은 명시적으로 그려지지 않지만, 그녀가 시를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했던 것이 손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가 아니라 죽은 소녀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였다는 점을 강하게 암시한다.
아그네스를 위한 노래, 끝내 완성된 한 편의 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미자는 시 강좌 마지막 수업에서 끝내 시를 써 오지 못한 유일한 수강생이 되고, 대신 그녀가 남긴 흔적과 목소리는 스크린 밖 내레이션으로 시 아그네스의 노래를 낭독하는 형식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 시는 죽은 여학생 박희진, 즉 아그네스의 시점에서 쓰인 것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카메라는 미자가 걸었던 강가와 다리, 학교 운동장 등 영화 곳곳에 등장했던 장소들을 다시 비추면서 마치 죽은 소녀의 영혼이 그 공간들을 통과해 떠나가는 듯한 여운을 남긴다. 이 시퀀스에서 미자의 목소리는 점차 아그네스의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카메라가 강물이 흐르는 다리 위에 서 있던 소녀의 뒷모습을 비추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는 가해자의 가족이 피해자를 대신해 그녀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대변함으로써 뒤늦은 애도와 속죄를 완성하려는 시도로 해석되며, 동시에 미자 자신이 잃어가는 언어와 기억을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려 했던 처절한 창작 행위로도 읽힌다. 실제로 영화는 미자가 이후 어떤 선택을 했는지, 즉 그녀가 경찰에 사건을 신고했는지, 스스로 생을 마감했는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은 채 여백으로 남겨두는데, 이러한 열린 결말은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가 완성한 단 한 편의 시가 지닌 무게를 더욱 오래 곱씹게 만든다. 이창동은 폭력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시라는 가장 정제된 예술 형식과 병치시킴으로써, 언어로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도 인간이 끝내 무언가를 쓰고 남기려 하는 이유에 대해 깊은 성찰을 남긴다. 영화 제목이 단순히 시라는 한 글자로 압축된 것처럼, 이 작품 역시 군더더기 없는 절제된 화면과 대사로 채워져 있으며 배경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자연의 소리와 정적만으로 정서를 쌓아 올린다. 이러한 미니멀한 연출 방식은 관객이 스스로 인물의 침묵 속에 담긴 감정을 채워 넣도록 유도하며, 이 작품이 2010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이유 역시 사건의 무게를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윤리적 질문을 시적인 언어로 승화시킨 완성도에 있다고 평가된다. 윤정희에게 이 작품은 오랜 공백을 깨고 복귀한 은퇴작이자 마지막 스크린 출연작이 되었으며, 배우 개인의 인생 후반부와 미자라는 인물의 여정이 겹쳐지면서 관객은 스크린 안팎에서 동시에 사라져가는 존재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게 된다.